현대사회는 모래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은 모래처럼 뿔뿔이 흩어져 존재하는데 (러시아워의 지하철 환승역 풍경을 생각하라. 그 많은 익명의 사람들. 그들 사이에 무슨 질적인 관계가 존재하는가?) 사회 자체는 유기적 구조물처럼 견고하고 잘 돌아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판적 사회학자들은 그건 다름아닌 현대사회를 안보이게 통제하고 있는 완벽한 사회관리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반드시 후기자본주의의 비판사회학자들이 처음으로 제기했던 질문이 아니다. 이미 17C에 G. W. 라이프니쯔는 개체와 우주의 관계를 똑같은 방식으로 질문 했었다. 아무 상관없이 흩어진 개체들이 어떻게 우주라는 유기체를 형성하고 살아있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쯔는 ‘모나드 (Monade)’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모나드는 번역하면 ‘단자’다. 그것도 ‘창문 없는 단자’다. 즉 그것은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는 독자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단자와 단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모래처럼 흩어져 존재하는 단자들이 함께 존재함으로써 우주는 유기체처럼 살아서 돌아간다. 즉 개체들 사이에는 관계가 없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시공간 안에 공존하게 되면 모종의 결속력이 단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종의 결속력, 드러나지 않은 채 작동하는 조화의 에너지, 그것을 라이프니쯔는 신의 섭리,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운명적 하모니 (praestabilierte Harmonie)'로 설명했다.

The modern society is a society of sands. Members of this society exist as sands scattered across the world. (Picture a subway transit station during the rush hours. All those anonymous people. What qualitative relationships could possibly exist among them?) The society itself is as robust as an organic structure and it functions well. How can this be possible? Critical sociologists say that it is because of an invisible yet perfect social management system that controls themodern society. However, such an issue was not necessarily first raised by critical sociologists of late capitalism. Already in the seventeenth century, G. W. Leibniz raised a question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entities and the universe in the exact same fashion. How do entities dispersed from each other with no association form an organism called the universe? To answer this question, Leibniz introduced the concept of "Monade." When translated into English, a monade simply means a terminal. It is even a "terminal without windows" at that. In other words, monadsare independent beings completely isolated from the outside and thus, there is no association between them. However, due to the very existence of these monades that are scattered like sands, the universe comes to life like an organism and functions. That is, even if there is no relation between entities, when they exist in a single time and space, a sort of solidarity exists between them. Leibniz explained this type of solidarity, or the invisible energy of harmony at work, as the Providence of God, or more accurately, "fatal harmony (praestabilierte Harmonie)."

사진은, 특히 영화와 비교할 때, 본질적으로 모나드다. 물론 사진은 현실에서 탈취한 한 편린이다. 하지만 사진이 된 현실의 편린은 두 번 다시 현실로 재접목될 수가 없다. 그 되돌릴 수 없는 단절성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게 사진의 프레임이다. 예컨대 영화의 프레임은 유동적이다. 영화 또한 현실의 편린들을 보여주지만 한 장면에서 잘려나간 부분은 다음 장면에서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결국 영화는, Ch. 메츠가 말하듯, 다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본래적으로 포르노그라피라고 F. 제임슨은 말한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는 다르다. 사진에서 한 번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부분은 두 번 다시 프레임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사진, 그것은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다. 오로지 내부만이 존재하는 창문 없는 모나드 이미지이다. 사진이 프레임 밖 모종의 현실을 지시한다면 다름아닌 이 창문 없는 모나드적 성격 때문인 것이다.

Photographs are, in essence, monades, especially when compared to films. Of course pictures are only fragments extracted from the reality. However, these fragments of the reality in the form of photographs can never be put back together to become a reality. That irreversible severance is clearly represented in a picture's frame. A movie's frames are, on the contrary, fluid. While films, too, show fragments of the reality, what was cut out in one scene comes back into the frame in the next scene. As Christian Metz put it, films reveal everything. (That is why F. James said that movies are fundamentally pornographies.) However, photographs are different. Once something is cut out of the frame, it can never come back to the picture. A picture is an image that knows no external world. Only the inside exists in this monade image without windows. If a picture indicates some kind of reality outside the frame, that is because of the picture's nature as a monade without windows.

신혜선의 사진 또한 모나드다. 신혜선의 사진 또한 그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서, 내 경우, 네 개의 코드가 필요하다. 첫 번째 코드는 주제와 배경의 코드이다. 신혜선은 인물을 찍는다. 그 인물들은 모두가 자연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사진의 주제는 인물이고 자연은 부수적이다. 그러나 신혜선의 경우 사진의 무게중심은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배경 쪽으로 옮겨져 있다. 인물들에게 고유한 표정을 수여해 주는 건 (신혜선의 인물들은 모두가 무표정하다) 인물 자신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소속되어 있는 자연풍경들이다. 예컨대 만개한 꽃들, 무성한 잎들, 엉킨 나뭇가지들, 헐벗은 바위들, 들판과 하늘과 산들... 인물을 껴안고 있는 그러한 자연의 배경이 삭제된다면 신혜선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어떤 존재감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

Shin Hye-sun's photographs are also monades. Her pictures also refer to something. What is this something? In my case, I need four codes to read it. The first one is the code of themes and backgrounds. Shin takes photographs of people. All of the people use nature's scenery as background. Usually, the main theme of the pictures is people while the nature plays only a supporting part. However, the focus of Shin's pictures is centered on backgrounds rather than people. What gives the people unique facial expressions are not the people themselves but the nature to which the people belong (people in her pictures are all woodenly expressionless). If the nature as a background such as flowers in full bloom, leaves in profusion, entangled tree branches, naked rocks, plains, the sky, mountains, etc. that embraces the people is erased from Shin's photographs, what sense of existence will the people in her photographs have?

두 번째 코드는 객관성과 표현성의 코드이다. 신혜선의 시선은 위생적이다. 그녀의 위생적 시선은 작가나 오브제 모두에게 철저하다. 신혜선의 사진 속에서 작가의 서정적 감정이나 주관적 의도는 남김없이 증발되어 있다. 오브제인 인물들과 풍경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모두 무표정하고 프레임 공간 정중앙에 한그루 나무들처럼 직립하고 있다. 배경의 자연풍경들도 버려진 것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결과적으로 신혜선의 사진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건 음영의 법칙만으로 제시되는 사실성 그 자체 뿐이다. 하지만 그 엄정한 객관적 시선을 통해서 신혜선의 사진은 역설적으로 표현성을 획득한다. 그 표현성은 (이것이 또 하나의 코드를 필요하게 만든다) 작가 자신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서 발생되는, 말하자면 무의도적 표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The second code is the one of objectivity and expressionism. Shin's gaze is sanitary. Her hygienic gaze is strictly maintained for both the photographer and her objects. In Shin Hye-sun's pictures, any trace of emotions or subjective intentions is evaporated. That goes the same for people and sceneries, which are objects. People are expressionless and stand upright at the very center of the frame space like a tree. Natural sceneries in the background are coarse and crude. In the end, what exists in Shin's picture frame is the factuality itself suggested by the rule of shading. However, through this strictly objective perspective, Shin's photographs ironically obtains expressionism. This expressionism (which gives rise to the need for another code later on) is a type of unintentional expressionism, so to speak, that is generated by viewers, not by the artist herself.

세 번째 코드는 친숙함과 낯설음의 코드이다. 신혜선의 사진 속에서 보는 이를 낯설게 만드는 요소는 사실 아무 것도 없다. 인물들은 주변 어디서나 만나는 평범한 얼굴이고 풍경들 역시 대도시 근교 뒷산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 자연풍경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친숙한 대상들이 반복적으로 프레임 공간 안에 포획됨으로써 신혜선의 사진은 보는 이에게 이물감과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 어쩐지 낯선 친숙함/ 어쩐지 친숙한 낯설음 - 그러한 복합적인 데자뷔 감정이 야기하는 경험적 효과는 그러나 편안함이 아니라 모종의 불안함이다 (친숙함의 반복에서 발생하는 이 불길한 낯설음을 프로이드는 ‘섬뜩함 (das Unheimliche)’이라고 부른다). 이 불안함은 뭘까? 그것은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The third one is the code of familiarity and strangeness. In Shin's photographs, there is actually no element that makes the objects strange. The people have commonplace features that can be found in anywhere and the scenes in these pictures are also routine natural scenery witnessed in mountains that surround large, metropolitan cities. However, because these familiarobjects are repeatedly captured in the space of a frame, her pictures stir foreignness and unfamiliarity in viewers. Somewhat strange familiarly vs. somewhat familiar strangeness. The empirical effect caused by such complex emotion of dj vu is not comfort and but a kind of insecurity. (Freud called this ominous unfamiliarity generated by the repetition of familiarity "revulsion (das Unheimliche).") What is this sense of insecurity? What does it indicate?

마지막으로 남은 코드는 정보성과 정보화 될 수 없는 것의 코드이다. 인물과 자연, 객관성과 표현성, 친숙함과 낯설음의 정보적인 코드를 통해서 신혜선의 사진이 지시하고자 하는 건 코드화 될 수 없는 것, 정보화 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어떤 것은 항간에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회자된다. 무의식적인 것 (das Verdraengte), 비장소적인 것 (das Atopische), 동일화 할 수 없는 것 (das Nichtidentische), 탈코드적인 것 (das Unkodierbare), 타자적인 것 (das Andere)... 분명한 건 라이프니쯔가 모나드론에서 ‘운명적 하모니’라고 이름 지었던 친화적 에너지 또한 그 어떤 것의 한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 속의 우리들에게 그 어떤 것은 더 이상 긍정적인 얼굴이 아니라 모종의 낯설음과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습관의 두꺼운 각질을 깨트리는 그 부정적 데자뷔 체험은 하모니 없이 단자화 된 오늘날의 소외된 삶을 되돌아보도록 요청한다. 그 되돌아봄의 어려움 - 아마도 그것이 신혜선의 사진 앞에서 느끼게 되는 방어의식과 불편함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신혜선의 단자적 사진이 후레임 밖의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역으로 말해주는 것 또한 다름아닌 그 방어적 불편함일 것이다.

Finally, it is the code of informativeness and of things that can't be informatized. What Shin Hye-sun's pictures try to refer to are things that cannot be codified nor informatized with such codes as people and the nature, objectivityand expressionism, and familiarity and strangeness. These "things" have many names. Things unconscious(das Verdraengte), things out of place (das Atopische), things that cannot be identified (das Nichtidentische), things that are not codified (das Unkodierbare), things that are of others (das Andere)... What is clear is that the familiar energy, which was named by Liebniz as "fatal harmony" in his monade theory,is also a name of a thing. But to us in the modern society, this something is not a positive face anymore but unknown strangeness and insecurity. Such a negative experience of dj vu, which breaks the thick shell of habits, demands us to look back on marginalized lives of our time, which take the form of terminals without harmony. The difficulty of looking back may be the reason why we feel a sense of defense and discomfort in front of pictures by Shin Hye-sun. And it is also this defensive discomfort that tells us what Shin's monade-like photography actually refers to outside the picture frame.